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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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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
(원제: THE MYSTERIES OF HARRIS BURDICK)

크리스 반 알스버그 글그림 김서정 옮김
출간 2009. 1. 30
문학과 지성사
서평: 신혜은(성균관대 연구교수)


알스버그의 이 그림책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림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그림책이다. 알스버그는 이 책에 흑백 톤의 14점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각 그림에는 알 수 없는 제목과 짤막한 글이 있을 뿐 그 그림들에는 서로 어떠한 관련성도 없다. 이 책을 접한 독자는 처음에는 “어? 뭐지?”라는 느낌을 갖지만 한 장 한장 넘기고 있노라면 보면 볼수록 그 무게 감이 더해져 독자 자신도 알 수 없는 심오함에 이르게 된다. 그저 아름답다 라는 말로는 부족한, 뭔가 깊은 심연 속에 있던 인간의 심리를 끌어 올리는 듯하다. 흑백이 주는 환상적이고 미스터리 한 느낌은 주제 통각 검사(TAT)라고 불리는 심리검사를 보는 듯하다. 주제통각 검사는 모호한 그림을 보여주고 그림에 대한 자유로운 이야기를 꾸며내게 해서 그 이야기 속에 투사된 마음 속 희망이나 감정 등을 알아내어 그 사람이 지닌 무의식적인 욕구나 동기, 성격 등을 알아보는 검사이다. 그런 이유로 이 그림책은 독서치료용 그림책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알스버그는 해리스 버딕이라는 수수께끼 속의 인물이 남기고 사라진 먼지 쌓인 그림들을 다시 자신만의 기법으로 재현해 냈다. 알스버그가 그려낸 각각의 장면들은 안개 속의 알 수 없는 아련함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괴상 망측 기괴하고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우습고 터무니없기도 하다. 아마 독자들 중에는 이런걸 어린이들에게 주어도 될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이 1984년 처음 출간된 이래로 미국 초등학교나 중학교 학생들의 글쓰기 소재로 널리 쓰이고 있다는 걸 보면 어른들이 걱정하는 그런 면은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책임에 틀림 없다.
알스버그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자기가 어떻게 이 그림들을 접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그림의 원본은 해리스 버딕이라는 남자가 30년 전에 어린이 책 출판사에 일했던 웬더스 씨의 사무실에 놓고 간 것들이며, 헨더스 씨의 아이들과 그 친구들이 해리스 버딕의 그림들을 보면서 수십 편의 이야기를 써 놓았다는 것이다. 알스버그 자신은 버딕의 그림과 아이들이 써 놓은 이야기들을 읽느라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결국 알스버그는 다른 아이들도 이 그림들을 보며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버딕의 그림들을 다시 그리게 된 것이라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난 후 천천히 책장을 덮었다. 그때 머리 속에 ‘어쩐지 해리스 버딕이라는 인물이 알스버그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가 사실이든 아니든 알스버그가 이런 그림책을 만들어 냈다는 자체로 가히 천재적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우연히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 홈페이지에 들어 갔다가 해리스 버딕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93년 알스버그는 Mr. Hirsch 라는 사람으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오래 전에 중고로 사들인 거울이 깨졌는데, 그 거울유리와 나무 판 사이에서 그림 한 장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누가 그렸는지 사인도 없고 그저 가장자리에 ‘Missing in Venice’ (베니스에서 길을 잃다)라는 제목과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베니스에서 길을 잃다’ 는 이 책의 본문 4번째 장면의 제목이다. 그러므로 Mr. Hirsh가 발견한 그림은 ‘베니스 에서 길을 잃다’ 라는 제목의 또 다른 장면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 알스버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 그림의 크기나 기법이 버딕이 남기고 간 14점의 그림과 똑같이 일치했다고 한다. 버딕은 왜 거울 속에 그 그림을 넣어 놓았을까? 그것 역시 미스터리로 둘러싸인 해리스 버딕 다운 행동이다.
번역본에서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원문의 제목과 번역본의 제목이 미묘한 차이로 인해 그 의미가 다르게 전달될 가능성이었다. 이 부분은 이전 그림책 [할머니의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에서도 언급되었던 부분이다.
[THE MYSTERIES OF HARRIS BURDICK ] vs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
이 둘은 미묘한 지점에서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건 아닐까? text 상으로는 할머니의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 (Wilfrid Gordon McDonald Partridge)에서처럼 전혀 다르게 번역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체의 크기나 굵기를 통해 두 책이 서로 다른 부분을 강조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미스터리의 핵심이 해리스 버딕이라는 인물 자체에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번역본이 넘쳐나는 우리나라 그림책 현실에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번역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는 현재 본 학회 <국제아동도서 연구 분과>에서 활발히 진행 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제목 번역과 관련된 부분은 [그림책의 제목 번역에 반영된 유아, 교육, 그리고 그림책에 대한 관점] 이라는 논문으로 곧 만나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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